"그동안은 추워서 못했는데, 날 풀리니까 이집 저집 돌아가며 시작을 했지요. 베를 맬려면 너른 마당에 펼쳐두어야 하니께."
베 매고 짜는 일이야 예로부터 아낙들 일이라는 듯 먼발치에 앉아있다가는, 일손이 필요하다 싶으면 슬그머니 다가가 꼬인 명주실 몇 올을 풀고 이내 다시 돌아와 앉는 이찬우 할아버지. 바쁜 아낙들을 대신해 그이가 먼저 말문을 연다.
쟁기 모양으로 생긴 들말의 한쪽 기둥에 단단히 묶인 베는 거대한 실패 즉 도투마리에 말린 채, 다른 한쪽 들말에 팽팽하게 잇닿아 있다. 풀기를 말리기 위해 뭉근한 화로가 놓여있는 베판 위를 풀빗자루가 춤을 추고 지나면, '바디'라고 불리는 참빗 모양의 촘촘한 가름대가 명주실 올올을 머리를 빗듯 가지런히 가다듬는다. 바디가 다가올수록 뒤켠에서는 꼬이거나 엉킨 명주실을 푸는 손놀림이 부산해진다. 하나같이 두텁고 옹이진 손들. 명주실의 빛깔이 투명하고 고울수록, 트고 갈라지고 거스러미 일어난 손이 보는 이의 마음을 겹게 한다.
지금처럼 베를 매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내려 감는 작업과 일일이 실패에 감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실을 뽑는 것을 '베를 내린다'하고 분유통 같은 깡통에 감는 것을 '베를 난다' 한다. 이렇게 '내리고', '나고', '매고' 난 뒤에야 베를 '짤 수' 있다.
명주실을 직접 뽑아 명주베를 짜는 국내 유일한 곳

지금이야 천지에 우리 마을 한 군데지만, 예전에는 참 흔하디 흔한 풍경이었제. 할머니가 베짜는 거, 어머니가 베짜는 거 다 보고 자라다가, 처녀소리 들으면서부터는 나도 짜기 시작해 시집 와서 또 짜고….
나이 열아홉에 동네 하나 건너 두산리 마을로 시집을 온 김영자 할머니(73세)의 말이다. 아직도 집에서 그네의 발놀림, 손놀림에 쿵터덕 쿵, 척 쿵터덕 쿵, 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베틀은 시어머니의 시할머니 때부터 쓰던 것으로, 4대에 걸쳐 내리 물림 되어온 것이다.
김영자 할머니가 시집 올 때 붉은 명주치마를 입고 왔듯이 명주옷감은 멀게는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가깝게는 일반가정에서 혼례와 같은 경사 때 자주 쓰이던 옷감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복문화가 사라지고 또 기계식 대량생산법이 개발되면서 그네들이 기계주라고 부르는 베에 밀려나 손으로 직접 짠 명주베 즉 손주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우리 국토 어디에도 손으로 명주실을 직접 뽑아서 잦고 꾸리를 만들어 명주베를 짜는 마을은 이곳 양지마을을 빼고는 없는 것이다. 두산리 양지마을 30가구 중 18집이, 공동작업이 필요한 단계에서는 돌아가면서 품앗이를 해가며 명주베를 생산해 낸다.
할배, 할배 적부터 오백 년은 족히 짰을 것이라는 말로 김영자 할머니의 말을 거들던 이춘희(65세) 할아버지가, 두산리가 국내 유일의 명주마을이 된 사정을 들려준다.
우리 마을에서도 한동안 맥이 끊겼었다가, 시에서 장려를 하니까 한 집 두 집 다시 베를 짜기 시작했지. 농사짓고 나면 남는 시간에 노인들이 뭐 할 일이 있나. 이래 모여 가지고 같이 일하믄 심심지 않고 돈도 되니 좋지. 그래도 다른 마을들에서는 힘들다고 안 한다는데, 용케도 우리 마을에서는 뜻이 모아졌어요.
그렇게 짠 베는 잿물에 삶아서 사나흘을 물에 담갔다가 말리고, 다시 담갔다 말리기를 반복한 후에 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한다. 두 필을 짜는 데 걸리는 시간이 꼬박 보름이 소요되니, 그 공들임과 손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힘은 들지만, 마을 전체가 연간 200필 정도를 짜서 약 7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농가부업으로는 꽤 큰 소득인 셈이다.
만들어진 명주베는 대부분 망자들을 위한 수의(壽衣)용으로 쓰이는데, 생산량이 적은 만큼 소비량도 적은 편이다.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여, 어느 나이에 이르면 노인들 스스로 혹은 가족들이 수의를 준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다만 가까운 옛날만 해도 좀 있는 집에서는 명주수의를,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삼베수의를 사용해 왔지만 지금은 내남없이 기계식으로 짠 삼베수의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려한 광택에서부터 풍성한 촉감, 흙에서 잘 썩어 환경친화적이라는 점 등 해서 천연 비단으로 만든 수의의 장점만은 변함 없이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명주수의에는 누에고치 속에서 잠을 자고 난 누에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새로운 삶을 준비하듯이, 누에고치의 실로 짠 수의를 입고 죽음이라는 긴 잠을 잔 뒤에 새로이 환생하기를 바라는 염원까지 담겨있다.
명주베 한 필의 가격은 대략 50만 원 정도로, 수의를 짓는 데 드는 양이 여자는 3필, 남자는 4필 가량이 된다. 거기에다 바느질 수공을 합하면 보통의 농촌 아낙들이 꿈도 꾸지 못할 옷값이지만, 명주베를 직접 짜는 덕분에 이곳 주민들은 내남없이 그 값비싼 명주수의를 하나씩 다 마련해두고 있다.
정성과 염원이 담긴 천연비단의 명주수의
현재 이 마을에서 명주베를 짜는 아낙들 중에는 56세가 제일 젊고 그 아래로는 더 이상 배우겠다 나서는 이가 없으니, 이 손주 명주베의 전통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때문에 오늘 이찬우 할아버지네 마당에서 노인들이 잇고 있는 것은 단순히 명주실이 아니라, 명주베의 전통과 품앗이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베를 매며 품앗이하는 노인들의 정담소리와 베틀소리가 야트막한 흙담을 넘나드는 두산리 양지마을을 돌아 나오며, 고치속에서 잠을 자고 난 누에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새로운 삶을 준비하듯이, 이곳 <두산명주>의 전통이 이어지고 이어져 언젠가는 보다 화려하게 부활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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